샤를 보들레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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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출간, 72페이지, 페이퍼백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을 일러스트레이션과 함께 불어와 스페인어 이중언어로 펴냈다. 

(위키피디아 소개자료)

보들레르는 느리고 까탈스러운 작가였고 종종 게으름과 감정적인 고통과 병환으로 작업을 미루곤 했다. 결국 1857년에 가서야 그의 첫 시집이며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 출판되었다.[1]:191 이 시들 중 몇 편이 이미 《르뷔 데 되 몽드》(Revue des deux Mondes)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적은 수의 안목 있는 독자들만이 《악의 꽃》을 읽었으나 시들의 주제는 큰 이슈가 되었다. 다른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고 막대하며 예측불허였고, 선망과 정의할 수 없는 두려움과 뒤섞여” 있었다.[1]:236 그 당시 《보바리 부인》의 소재를 다룬 방식이 풍기문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던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보들레르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은 낭만주의를 새롭게 할 방법을 찾아냈소. 당신은 대리석만큼 견고하고 영국의 안개처럼 예리하군요.”[1]:241

이 시집의 주요한 테마인 섹스와 죽음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또한 레즈비언 관계, 성스럽고 불경한 사랑, 변형, 우울, 도시의 붕괴, 사라진 순수성, 삶의 억압성 등의 주제를 다뤘다. 노스탤지어를 일깨우는 후각과 향기의 이미지가 이 시집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1]:231

그러나 이 시집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그 시대의 주류 비평가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시 몇 편을 “열정과 예술, 그리고 시의 대작들”이라고 칭했으나 다른 시들은 판매 금지를 위한 법적 제제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1]:232-237 보들레르를 고발했던 비평가 하바스는 《르 피가로》에 이렇게 썼다. “이 시집에서 흉측하지 않은 것이라곤 이해 불가능한 것들뿐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타락한 것들뿐이다.” 그러자 보들레르는 이 항의에 대한 대답으로 그의 어머니에게 예언적인 편지를 썼다.

“어머니는 내가 항상 문학과 예술이 도덕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적을 추구한다고 생각해왔던 것을 압니다. 내게는 구상과 스타일의 아름다움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당신도 알게 되겠지만, 이 《악의 꽃》이라는 책은,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노와 인내로 쓰인 책입니다. 게다가 이 책의 긍정적인 가치의 증거물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악 안에 있습니다. 이 책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느껴야 하는 고통이 두려워 나는 그 증거들 중 삼분의 일 가량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들은 내게서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발명의 정신과 심지어 국어에 대한 지식까지도. 나는 이 모든 바보짓꺼리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미덕과 단점을 지닌 이 책이 문학적 소양이 있는 독자들에게 빅토르 위고나 테오필 고티에 심지어 조지 고든 바이런의 명시들과 나란히 기억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1]:238”

보들레르와 그의 출판업자들은 풍기문란죄로 고소당했고 결국 벌금을 물게 되었으나 수감형에 처해지지는 않았다.[1]:248 이 6편의 시는 이후에 브뤼셀의 다른 출판사에서 《잔해들》(Les Épaves)이란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1861년에 6편이 삭제된 상당한 양의 시가 첨가되어 《악의 꽃》의 또다른 판본이 출판되었다. 많은 유명인사들이 보들레르 뒤에 결집하여 법원의 판결을 비난하였다. 보들레르가 탄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벌금은 감해졌다. 거의 100년이 지나서 1949년 5월 11일, 보들레르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고 그의 삭제된 6편의 시가 프랑스에서 다시 출판되었다.[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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